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기점으로 8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9일에는 나가사카에 원폭이 투하된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10일 단파방송을 통해 포츠 담선언 수락예정을 깨닫고 항복에 앞서 대형 댄스홀을 건립한다. 이들은 소련군의 행패가 심하다는 정보를 입수, 앞으로 진주해 올 연합군을 위해 댄스홀을 지으려 한것이다. 8월 14일 밤 10시에는 설마하던 일본의 패망이 동맹통신 경성지국을 통해 확인 된다.
혼란한 분위기에서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원들은 친일파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몽둥이를 들고 몰려다니며 장안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든다. 서울에 연합군이 진주해 올 동안 누가 치안을 맡아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군부와 경찰이 심한 충돌을 일으켜 민심은 흉흉하다.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행림서원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던 학생들을...
장안파와 재건파로 갈라져 대결하던 정백과 최익한이 박헌영에 맞선다. 최익한은 같은파였던 하필원이 자기를 배신하고 박헌영편에 서자, 첩인 성녀를 시켜 그를 독살하려 한다. 이 일이 미수에 그치자 최익한은 더욱 궁지에 몰린다. 그는 정백과 함께 언론기관을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어거지로 매일신보를 장악한 최익한과 정백은 해방일보라는 간판을 내걸고...
평양주둔 소련이 치스차코프 대장과 조만식이 회동한 후 평남정권은...
이기붕, 장덕수 등은 조선 국민당에서 함께 일하던 민세 안세홍이 돌연 이탈하자 충격을 받는다. 안재홍은 한때 건준에 있다가 탈퇴하여 조선 국민당에 가입했었는데 이번에는 조선 국민당이란 당명을 가지고 이탈을 선언한 것이다. 하는수 없이 이기붕은 한국 민주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임영신은 여자 국민당을 창설한다. 여운형이 주축이 된 건준은 난립하는 정당에...
조선 민족당, 조선 민주당, 국민당, 한국 국민당 등 우익정당들은 건준의 인공 조각을 계기로 일제히 건준 활동을 비난하고 나선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로 인하여 건준의 존재가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리라 판단, 오히려 흐뭇해 한다. 이무렵 교육계에만 몸담고 있던 김성수가 정치활동을 개시, 국내 보수세력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우익진영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국군 창설에 착수한다. 박헌영은 여운형도 모르게 국군준비대를 창설한다. 여운형이 뒤늦게 군사조직에 눈을 돌렸을땐 이미 박헌영보다 한발 늦어있었다.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입성한 소련의 앞잡이 36명의 명단 중 김일성, 남일, 박당 등이 있음을 확인한 박헌영파는 김삼룡 등과 함께 노동자 농민 여성들을 대상으로한 조직과 공산주의 운동전개에 혈안이 된다. 건준의 여운형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도입을 선언한다. 이에 민족진영은 공산주의 이론과 여운형이 주장이 일반 대중들에게 급속히 전파되어 가고 있음에 큰 우려를 표명한다. 한편, 일본군과 만두군 장교 출신을 중심으로한 조선군사위원회가 조직된다.
미군이 진주함에 따라 국내 각 정치 지도자들은 이들과 접촉을 하기 위해 부산하다. 이즈음 여운형이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박헌영 일파는 그를 회색 분파로 몰아 붙인다. 이기붕은 미군 선발대장 해리슨 준장을 만나 유학파인 조병옥과 장덕수, 장택상 등의 이력서를 전달한다.
민정장관 인재홍은 여운형과의 협력을 모색한다. 남다른 야심과 영웅심으로 가득찬 여운형은 좌우익의 충돌로 고민한다. 조선공산당 내에는 최익한의 박헌영에 대한 규탄서로 파문이 일고 미군정청은 식량정책에 반발하는 대규모 군중 폭동이 일어나자 대책마련에 부심한다. 미군청정이 건준과 인공의 해체를 선언하자 여운형은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쓰러지고, 이즈음 백발의 이승만 박사가 많은 국민의 환영속에 귀국한다.
이승만 박사의 환국을 맞은 민족진영은 민족의 구심점 찾기에 부심해졌고 남로당도 이에 질세라 이승만을 옹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승만은 이에 개의치 않고 4대당 당수 간담회를 촉구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자는 주장은 퇴색하고 임시정부 이정을 둘러싼 논란 등 분열의 조짐이 싹튼다.
여운형은 진로를 잡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는 마침내 7만여명으로 구성된 건국동맹을 조선인민당으로 개편한다. 한편, 미군정이 국군준비대의 해산을 명하자 박헌영은 총사령관 이혁기를 사주한다. 이승만 박사는 마침내 북위 38도선 이남 만이라고 공산주의 운동을 불법화 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린다. 이에 박헌영은 우선 자기 조직을 살리기 위해 미군정에 대한 전폭적인 협력을 선언한다. 환국한 임정요인들은 1945년 11월 23일 드디어 국민들 앞에 첫 인사를 한다.
임시정부 대변인 엄항섭은 앞으로는 임정이 정부역할을 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한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미군정측은 즉각 임정의 존재를 부인한다. 박헌영은 군정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지만 여운형은 지켜보는 입장이 된다. 이즈음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정을 송진우, 장택상 등이 지원하고 나선다.
한민당의 재정지원 제의에 대한 임정의 거절은 급기야 친일 논쟁으로 비화한다. 여운형은 김구와의 접근을 모새하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1945년 12월 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열려 신탁통치안을 결정한다.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던진 신탁통치의 파문. 그것은 온 민족의 분노를 사기에 족했으며 흩어진 정당정파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임정이 주도하는 국민 총동원 위원회가 성립된지 하루만에 각계 대표 1천여명이 죽첨장을 찾아와 오랜만에 민족의 화합이 이뤄질듯한 분위기가 된다.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의 피살로 정가는 침통한 분위기다. 경찰은 범인 체포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수사에 별 진전은 없다. 임정의 소행이란 풍문이 장안에 나돈다. 임정이 고립될 것에 대비, 박헌영, 여운형 등은 임정과 인공이 동시 해체하여 하나의 단일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의한다.
송진우, 후임으로 김성수가 한민당 수석총무로 등장, 정계에 새로운 변화조짐이 인다. 여운형은 임정의 세력이 약화됐다고 판단, 인공을 앞세워 임정을 매도하고 나선다.
채문식, 이철승, 박용만 등 현역 정치인들이 극중 인물로 처음 등장한다. 연안독립동맹의 신탁통치 지지에 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도 찬탁에 가담한다. 박헌영은 반탁을 해야할지 찬탁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이철승 등이 주동이 된 전국 학생연맹은 반탁을 위한 군중대회 소집을 계획한다.
학병동맹의 기반을 흔들어 놓은 장택상, 조병옥 등은 공산당과 군정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맏는다. 한편, 이승만과 독립촉성충앙협의회는 김구가 제안한 비상정치회의에 들어가기로 결정함으로써 정가는 다시 활기를 띤다. 송진우 살해범을 끈질기게 추적한 경찰은 송진우의 경호원이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맑혀낸다. 임정의 선전부장 엄항섭이 배후인물이라는 풍문이 나도는데...
경찰은 송진우 암살범 한현후의 배후를 캐려고 수사력을 집중하지만 한현우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수사과정에서 송진우뿐 아니라 여운형, 박헌영 등도 차례로 살해하기로 했다는 한현우의 당초 계획이 발표된다.
한현우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전병구가 검거되자 수사는 활기를 되찾는다. 한현우 일당을 검거하고도 배후가 모호해 궁지에 몰렸던 경찰은 모든 기대를 전병구 심문에 건다. 한편, 조선민주당 사무국장이었던 함대훈의 증언으로 엄항섭이 한현우의 배후라는 설은 사라지고 엄항섭 배후설로 임정을 궁지에 몰려던 박헌영 일파의 당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박헌영은 뉴욕타임즈 특파원 존 스톤과의 회견에서 조선은 소련의 연방이 되어도 좋다는 충격발언을 한다. 이 회견 내용이 매일신보에 게재되자 정가는 벌집을 쑤신듯 시끄럽다.
박헌영은 이강국의 술책으로 장안파와 여운형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난다. 박헌영은 민전대의원회를 교묘하게 역이용, 일단 무산된 집회를 자기가 소집하고 나선다. 그는 이번에도 김수임을 동원하여 군정관리들로부터 집회 허가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역습을 당하게 된 장안파와 여운형은 당황해 하고 조병욱, 장택상 등은 미 군정에 항의를 한다.
공산당 폭동을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조병욱, 장택상 등은 치안 유지법을 적용, 불법 무기소지 혐의를 뒤집어 씌워 이주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무차별 구속한다. 그때 공산주의자 황주신 교수는 치안유지법이 이미 효력을 잃은 법이란 사실을 밝혀낸다.
치안유지법 파문으로 궁지에 몰린 경찰을 위해 새로운 법을 제정하겠다던 이승만의 당초 계획은 공산당의 극렬한 반대성명에 부딪친다. 여운형은 김구를 찾아와 민주의원에서 법령제정에 앞장 선다면 조직으로부터의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어렵게 제정된 군정법령 72호에 의해 테러와 폭동을 일삼던 남로당원들이 속속 체포된다. 새로운 난관에 봉착한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은 대대적인 반대시위와 함께 김매리, 김수임을 앞세운 새로운 공작을 펼친다.
남로당의 테러가 전국각지에 꼬리를 문다. 김수임의 공작으로 돈을 물쓰듯 했던 박헌영 일당은 자금이 바닥난다. 남로당의 재정부장 이관술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을 찾는다.
방을 열어본 김삼룡은 방안이 아수라장이 된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불속에서 얼울에 심한 상처를 입고 누워있는 이순금을 발견하고는 또 한번 놀란다.
파면이 결정된 최능진은 헌병사령부와 손을 잡고 파면의 부당함을 들어 재심을 청구한다. 이즈음 조선공산당 인천지부장 조봉암은 지금까지의 공산당의 모든 실책을 들어 박헌영을 규탄하고 나선다. 그러나 박헌영은 며치이 지나도록 종적이 묘연하다.
조선공산당이 위폐를 찍으면서 그토록 보안을 다졌지만 엉뚱한 곳에서 계획이 무너진다. 드디어 경찰이 눈치를 채기 시작한다. 이른바 정판사 사건이다. 전국에 호열자가 만연, 매일 수백명씩 죽어간다.
1946년 7월 29일 정판사 위폐사건 공판이 시작된다. 방청석을 메운 공산당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적기가 부르는등 난동을 부린다. 피고인들은 재판관에게 욕살을 한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박헌영 일당은 월북하거나 잠적해버린다. 남은 인물이 이주하와 김삼룡. 경기도 경찰청장 장택상은 공산당 검거 선풍을 일으킨다.
공산당의 지하운동이 격렬해지고 있는 가운데 아들의 행방을 찾아나선 종만은 통금 위반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다. 곡물 파동에 이어 경성 철도파동이 일고있는 가운데 정가에서는 서서히 민정 이양을 위한 작업이 진행된다.
공산당 지하조직은 그 세력을 영호남 일대로 무섭게 뻗친다. 폭도들을 지휘하던 진석은 경찰에 검거되고 그 화가 가족에 까지 미쳐 집안은 온통 아수라장이 된다. 종만과 수달은 야바위 장사놀음에, 혜진은 다방 레지로 나선다.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해 오던 김규식은 입법의원선거의 불합리했던 점을 들어 전면 또는 일부 재선거를 주장하고 나선다. 이렇듯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대구폭동 관련자와 일반 사상범 480명의 집단 탈옥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은 다시 한번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을 새롭기 하기 위한 도미계획을 발표한다. 미군청정의 하지 사령관은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단정하여 맹렬히 비난한다. 반면 우익진영에서 적극적인 찬성을 표시, 정국을 뒤흔드는 일대 공방전이 시작된다.
해방정국에 큰 활기를 불어넣은 이승만 박사의 방미는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중도파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거국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런와중에 관선 입법위원 45명이 발표된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와 김구는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미국 방문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구의 대립이 깊어간다. 이즈음 미 국무장관 마셜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임하는 소련측의 무성의를 비판함으로써 국제정세에 편승하려는 이승만의 주장이 먹혀들어가게 된다.
신탁통치를 놓고 각계의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월남 피난민의 수는 계속 늘어간다. 여기에 편승하여 월남 동포를 가장한 인민혁명군 조직의 도시 게릴라들도 다수 월남한다. 이러던중 어느날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서 몽양 여운형은 괴한이 쏜 총에 피살되고 만다.
여운형의 암살범은 19세의 한지근이란 청년으로 맑혀진다. 한지근을 취조하던 수도청장 장택상은 여운형의 정치사상을 조리정연하게 비판하는 그의 당당한 태도에 놀란다. 여운형이 암살된 후 정가는 침통한 분위기에 쌓인다.
1947년 9월 27일, 소련은 갑자기 미소 양군의 철수안들을 들고 나와 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미 국무성은 이같은 제의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려는 미국측의 입장을 곤궁에 빠뜨리려는 악의에 찬 제안이라고 반박한다. 미소 공방전의 틈마구니에서 해방정국은 시한폭탄과 같은 위기를 맞는다.
영석의 고무신 공장이 폭파되는 등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하자 좌익 기자들은 혁명적 거사하고 대서 특필한다. 이어 수도청은 좌익 기자들을 대거 검거한다. 한편, 1947년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측 제안이 통과된다. 한국의 총선거를 감시할 국제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독립정부 수립 후 외국군대를 철수시키자는 것이다.
유엔 한국위원단의 파견결정과 함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정국은 은연중 총선거를 의식하게 되고 국민의회를 필두로 한 158개 우익 정당들은 필연적으로 탄생할 임시정부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축을 벌이게 된다.
1948년 새해 벽두 유엔 한국위원단 사무국장인 호세택 일행이 입경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미군정청과 유엔위원단측은 총선거를 통해 한국인이 기원하는 진정한 민주국가를 수립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한편, 한독장은 백범의 뜻에 따라 변함없이 자유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맞선다. 한민당에서는 유엔한국위원단에 적극 협력할 것을 다짐한다.